[염노섭= 예술인 마당] '뻥튀기 동네' 단편동화는 이경(강원문학교육연구회 회장) 작가가 2023년 '롤러코스터 학교 소년, 소녀 사라지다' 단편동화집에 실은 작품이다.
작가가 어릴 적 봉의초등학교 인근에 살면서 겪었던 추억을 회상하면서 육림고개를 공간적 배경으로 쓴 동화로 독자로 하여금 몇 십 년을 거슬러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한다.
아래 동화에 삽입된 그림은 춘천에서 그림 그리는 화가로 '그믐달'과 '80년대 마을집' 표현이 인상적인 서현종 화가의 아크릴화 '육림고개'를 동화에 어울리게 직접 그래픽 처리하여 보내주었다.
▶다음은 이경(강원문학교육연구회 회장) 작가의 2023년 '롤러코스터 학교 소년, 소녀 사라지다' 단편동화집에 실은 작품이다.
뻥튀기 동네
글 이경 그림 서현종
▶뻥튀기 동네
봄내시 육림고개 뒷골목에는 뻥튀기 동네가 있다.
그곳 마을 어귀에는 수십 년 된 뻥튀기 집이 있어서 다른 동네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뻥튀기 동네라고도 했다.
80년대까지는 큰길에서 시장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이 뻥튀기 동네를 거쳐야만 했다. 매년 겨울이면 사람들은 옥수수나 쌀 등을 가지고 와서 줄지어 강냉이나 쌀밥을 튀겨 갔는데 그 광경이 장관이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먹을거리나 간식이 풍부하지 않던 시대였다. 강냉이나 쌀밥으로 만든 강정이 겨울 동안 간식거리가 되기 때문에 가정마다 이곳에 와서 강냉이를 튀겨 갔다.
세월이 지나 생활 형편이 좋아지고 먹을거리가 풍부해지면서 사람들은 뻥튀기나 강냉이를 튀기러 이 동네를 찾지 않는다. 흥청대던 시장도 인터넷 쇼핑과 대형 쇼핑몰의 등장과 함께 쇠락해왔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 도시재생 사업으로 육림고개는 청년몰이 생기기 시작했다. 청년들이 몇 십 년 된 허름한 집들을 새로 개축하여 장사를 시작하면서부터 동네가 제법 활기차졌다.
안나는 친구들이 많이 사는 학교 앞 아파트로 이사를 하자고 아빠를 조르곤 했다. 아빠는 언젠가는 집값도 오르고 땅값도 오를 테니 불편해도 조금 더 살자고 하는 중이다.
세월이 흘렀어도 이 도시 사람들은 여전히 이 동네를 뻥튀기 동네로 기억하고 부른다. 뻥튀기를 튀기던 할아버지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도 말이다.
골목으로 들어오면 80년대에 지어진 크거나 작거나 한 집들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고쳐서 제법 번듯해진 집들도 있지만 대체로 칠이 벗겨진 대문에 집의 호수가 적힌 플라스틱 번호표가 달려있다.
골목 첫 집 101호부터 102호, 다음 집은 103호, 104호 이렇게 차례로 붙여진 집들이 대충 잡아 12채 정도 있다.
여기 101호에는 엄마랑 내가 살고 있다. 내 이름은 안나다. 안나는 골목을 나와 건너편 길가에 있는 노랑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이 동네 유일한 어린아이다.
안나가 이렇게 아는 것이 많은 이유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동네 공터 평상에 앉아서 어른들 이야기를 듣기 때문이다.
아빠는 지방 공무원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지방에서 올라온다. 안나 엄마는 마음 편히 해외여행 가보는 게 꿈이다.
평상시 동네 분들께 인사를 잘해서 동네 사람들은 안나와 엄마를 좋아한다. 안나와 엄마는 웃는 모습도 닮았다.
그런데 엄마는 가끔 이웃 201호 미실 아줌마가 얌체처럼 쓰레기봉투를 집 앞에 둔다고 안나 앞에서 투덜대기도 했다.
▶ 2_이모들
201호 사는 미실 아줌마는 동네일을 다 참견하면서도 자기 집을 알뜰하게 챙기는 이 동네 반장 아주머니다. 아들과 딸이 있는데 둘 다 대학생이다.
들어가는 돈이 많아서 늘 돈 걱정을 하고 산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동네일에는 앞장을 서서 해결하는 정의로운 대한민국 아주머니다.
적어도 안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쓰레기를 우리 집 앞에 버린다는 말을 듣고부터는 마음이 살짝 흔들리는 중이다.
안나가 제일 좋아하는 정이 이모는 103호에 산다. 직업이 편집디자이너라고 하는데 회사에 나가는 날보다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 더 많다. 나이가 엄마랑 같은데 엄마보다 매우 세련되고 옷도 잘 입는다. 그리고 이모한테서는 좋은 향이 나서 좋아한다.
동네에서 미실 아줌마네 다음으로 큰 104호는 이층집이다. 그 집에 사는 설이 아줌마는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과부다.
과부가 뭔지는 잘 모르지만, 남편 없이 혼자 사는 아줌마를 말하는 것과 같다. 사실 안나 엄마도 남편이 주말만 빼고 없다. 그래서 주말 과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설이 아줌마는 분식집을 운영한다.
가끔 엄마랑 같이 설이 아줌마 분식집에 놀러 간다. 아줌마는 떡볶이랑 어묵을 듬뿍 준다. 다 먹고 나서 엄마가 돈을 내려고 하면 안 받겠다고 하면서 돈을 돌려준다.
그러면 엄마는 몰래 선반 위에 놓고 온다. 어느 날은 밤늦게 튀김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참 마음씨 좋은 아줌마다.
43세에 아저씨가 운전 사고로 돌아가시고 그 후로는 시어머니랑 살고 있는데 시어머니는 폐지 모으는 것이 일이다. 주택 마당 한 켠 작은 창고에 폐지며, 폐 수집품을 정리해서 내다 팔곤 했다.
어느 날부터는 정리가 안 된 폐지가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다. 심지어는 냄새가 나서 동네 사람들이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이때부터 설이 아줌마가 할머니에게 잔소리하는 소리가 담 밖으로 들리곤 했다.
안나는 노래방 주인인 조나단 아줌마가 살짝 무섭다. 설이 아줌마네 2층에 세 들어가는 아줌마인데 술을 마신다.
이 아주머니도 이혼 후 생계를 위해 시장 안 건물 지하에 노래방을 차렸지만, 손님이 없어서 월세도 낼 수 없을 정도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밤에는 일하고 낮에는 집에서 잠을 자야 해서 가끔 동네가 시끄러우면 창문을 열고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지른다.
봄내시 중심에 있는 이 동네는 아침이면 안개가 자욱하다. 도시 가장자리에는 공지호와 소양강이 흐르기 때문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설이 아줌마 시어머니인 할머니는 새벽부터 마당에서 어제 주워 온 폐지를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었다. 박스에 붙은 상표나 비닐 테이프를 제거하고 반듯하게 펴서 크기별로 정리해서 묶는 중이었다.
할머니의 옆에는 작은 손수레가 있었는데 그 손수레 옆에는 검은 봉투가 있었다.
얼마 전에 할머니가 폐지를 가득 실은 손수레를 끌고 언덕 위로 올라오고 있었는데 이 모습을 본 미실 아줌마와 엄마가 힘을 모아 손수레를 끌어다 설이 이모네 집까지 밀어준 적이 있었다.
미실 아줌마는 할머니 짐을 정리해 주며 물었다.
“할머니, 몸도 불편하신데, 폐지를 이렇게 매일 주워서 판돈으로 뭐 하시게요?”
할머니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매일 분식집에서 밤늦게까지 고생하는 우리 며느리에게 집 하나 사주려고. 우리 며느리는 아범이 사고로 죽고, 나 데리고 사느라 고생 많이 했어. 늙은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설이네는 좋겠다. 그런데 폐지 주워서 언제 집을 사냐?”
미실 아줌마가 약간 빈정대듯이 말했었다.
▶ 3_집 앞의 쓰레기봉투
새벽이었다.
설이 아줌마네 집 마당 안에는 안개가 가득했다. 물병을 하나 든 조나단 아줌마가 대문 안으로 비틀거리며 들어섰다.
아줌마는 손에 든 물병의 물을 마셨다. 그리고 검은 봉투 안에 물병을 넣고는 계단을 통해 이층으로 올라갔다.
서서히 날이 밝아지면서, 낡은 폐지 뭉치를 이리저리 옮기면서 끈으로 묶고 또 풀기를 반복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천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날이 완전히 밝았다.
설이 아줌마가 현관문을 열고 나오다가 일찍부터 폐지를 정리하는 시어머니를 보았다. 설이 아줌마는 고개를 흔들면서 혀를 찼다.
“어머니 맨날 뭘 그렇게 모으고 또 모으고, 쌓고 또 쌓고. 도대체 왜 그러시냐구요? 이제는 지겨워요. 지겨워.
집안을 백날 치우면 뭐 하냐고요. 어제도 한 보따리 갖다 버렸구먼. 또 저렇게 모으고 있네.
어머니 제발 그러지 좀 말아요. 계속 이러면 못살아요. 저 일 다녀올게요. 식사 꼭 하세요.
밖에는 절대로 나가시면 안 돼요. 날이 추워서 감기 걸려요. 이거 제가 버릴게요. 쓰레기는 그때 그때 버리세요. 이렇게 두면 벌레 생겨요.”
설이 아줌마는 시어머니 목에 자신의 목도리를 벗어서 감싸 주었다. 그러고는 검은 봉투를 들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조나단 아줌마가 이층에서 소리를 질렀다.
“좀! 조용히 해 주세요. 어쩜 이 집안은 매일 시끄러워요! 세입자라고 무시하는 거예요! 잠 좀 자게 해 주세요. 난 새벽 3시에 들어왔다고요.”
안나네 집 앞을 지나가던 설이 아줌마는 주머니에 가게 열쇠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 가게 열쇠를 안 가지고 나왔네. 에구 내 정신.”
설이 아줌마는 자기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는 손에 든 검은 봉투를 그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가서 열쇠를 들고 나왔다.
“어머니, 추워요. 얼른 안으로 들어가서 식사하세요.”
설이 아줌마는 바쁜 걸음으로 안나네 집 앞이 아닌 아래쪽 골목으로 방향을 틀어서 빠져나갔다.
검은 봉투는 안나네 집 앞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설이 아줌마가 동네 골목을 빠져나가자 미실 아줌마가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 안나네 집 앞에 있는 검은 봉투를 보았다.
가지고 나온 쓰레기를 검은 봉투에 넣고 집으로 들어갔다.
학교 갈 시간이 되었다. 안나도 학교에 가기 위해서 인사를 하고 대문을 나섰는데 낯선 검은 봉투가 대문에 있었다.
안나 눈에는 쓰레기봉투로 보였다.
“웬 쓰레기가 우리 집 앞에 있지? 엄마! 엄마가 여기 쓰레기 놔두셨어요?”
“아니.”
엄마가 집안에서 말했다.
“아니라고요? 그러면 이거 앞집 아줌마가 두고 간 거 같아.”
안나는 미실 아줌마가 집 앞에 쓰레기봉투를 두고 간다는 엄마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쓰레기봉투를 미실 아줌마 집 앞으로 슬쩍 밀어 놓고는 학교로 향했다.
대문 안에서 마당을 쓸던 미실 아줌마는 인기척을 듣고 대문 밖으로 나왔다.
“어! 이게 뭐야, 누가 이렇게 쓰레기를 여기다 밀어 놓았지? 몰상식하기는 그냥 갖다 버리면 되지.
쓰레기 분리대가 여기서 10리도 아니고 100리도 아니고 바로 코앞인데. 쓰레기를 남의 집 앞에 버리는 심리는 도대체 알다가도 모르겠네.”
미실 아줌마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봉투를 번쩍 들어서 정이 이모 집 앞에 옮겨 놓았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정이 이모도 출근하려고 집을 나왔다. 이모의 손에는 종이컵이 들려져 있었다.
정이 이모는 시계를 보려고 멈춰 섰다가 쓰레기로 보이는 검은 봉투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몇 번 넘어지려고 뒤뚱뒤뚱하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는 가슴을 쓸었다.
“다행이다. 그런데 누가 여기에 쓰레기봉투를 버리고 갔지? 이건 분명 또 옆집 치매 할머니야.
지금 몇 시야?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 또 늦겠네.”
정이 이모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에 있는 커피를 후루룩 마시고는 검은 봉투 안에 구겨 넣었다.
그리고 봉투를 들어서 설이네 집 앞으로 가져가서 내려놓는 순간 이층 계단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조나단 아줌마와 눈이 마주쳤다. 조나단 아줌마가 소리쳤다.
“야! 아니 이봐요. 정이씨! 왜 남의 집 앞에 쓰레기를 버리고 가?”
정이 이모는 겸연쩍게 말했다.
“이거 제 쓰레기 아니에요. 저의 집 앞에 있길래 혹시 치매 할머니가 잘못 놨나 싶어서 도로 갖다 논거에요. ”
“무슨 소리야. 내가 분명히 두 눈으로 똑똑히 봤구먼. 어디서 발뺌이야?”
이때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듣고 미실 아줌마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인데 그리 시끄러울까요?”
정이 이모는 미실에게 편을 들어 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아니 이 쓰레기를 제가 버렸다고 이러시잖아요.”
조나단 아줌마도 지지 않고 따졌다.
“지금 막 놓고 가려고 했잖아!”
미실 아줌마는 아침에 본 쓰레기봉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안나네 집 앞에 두었는데 이게 돌고 돌아서 여기에 왔다는 것을 알고는 슬며시 말을 얼버무렸다.
“그냥 아무나 갖다 버리면 되지 뭘 그리 싸워요. 아침부터 시끄럽게.
도대체 이 동네 사람들은 낮이고 밤이고 없다니까.이리 줘요. 내가 버릴게요.”
정이 이모는 봉지를 다시 움켜쥐었다.
“무슨 소리예요. 내가 범인으로 몰린 상황인데 범인을 찾아야죠.”
조나단 아줌마가 말했다.
“아무튼 맘대로 해요.”
미실 아줌마는 정이 이모를 나무랐다.
“누가 가져가다 깜빡 놓고 갔겠지요. 일부러 그랬을까요.”
정이 이모는 조나단 아줌마를 노려보며 결연에 차서 말했다.
“범인을 꼭 잡아서 누명을 벗어야죠.”
조나단 아줌마도 지지 않고 말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속담에 방귀 뀐 사람이 성낸다고 그러던데.”
“뭐라고요? 정말 이게 내거라는 거예요? 증거 있어요?”
“증거? 찾아보면 다 나오게 돼있어요.”
조나단 아줌마는 무심한 척하며 빈정거렸다.
미실 아줌마는 두 사람 앞을 가로 막아섰다.
“그러면 모여서 한 번 찾아보죠! 동네가 시끄러워서 원. 조용했던 우리 동네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놀랍네요.
범인을 꼭 찾아서 양심을 함부로 버리는 사람들을 찾읍시다.
오늘 저녁 7시에 공터에서 반상회 할 테니까 한 분도 빠짐없이 나오세요.”
정이 이모는 시계를 보았다.
“늦었으니까 일단 가고요 저녁에 뵈요.”
검은 종이봉투를 자기 집 대문 안에 넣고는 종종걸음으로 골목 밖으로 뛰어나갔다. 정이 이모의 향기가 골목에 가득했다.
조나단 아줌마는 정이 이모의 향수 냄새를 지우려는 듯이 팔을 휘휘 저었다.
“향수를 들이붓고 다니네.”
미실 아줌마는 종이에 오늘 7시 동네 공터에서 모임이 있으니 모두 참석하라는 내용의 글을 써서 동네 입구 전봇대에 붙였다.
▶ 4_누구네 쓰레기일까?
7시가 되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네 사람들이 공터로 하나둘씩 나왔다. 미실 아줌마가 플라스틱 의자를 들고나와서 앉았다. 안나와 엄마는 평상에 앉았다.
조나단 아줌마는 전봇대에 기대어 서 있었다. 설이 아줌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기웃대며 왔다.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로 갑자기 반상회?”
이때 정이 이모가 문제의 검은 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이 봉투의 주인을 찾으려고 그럽니다. 제가 억울하게도 아침부터 파렴치한으로 몰렸거든요.”
안나는 깜짝 놀랐다.
‘아침에 분명히 미실 아줌마 집 앞으로 가져다 놓았는데 어째서 정이 이모한테 있는 거지?’
미실 아줌마가 의자에서 일어나 정리했다.
“이제부터 이 안에 있는 쓰레기를 확인해 보면 이 봉투의 주인이 누군지 나오겠죠?”
설이 아줌마는 아주 곤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저거 뭐야? 저건 내가 아침에 버리려고 했던 건데. 왜 저기 있지? 내가 아침에 안 버리고 그냥 갔구나. 어떡하지? 이제라도 말을 해야 하나? 나 때문에 싸움이 나겠는걸. 내가 버린 쓰레기인데 왜 저기 있는 거지?’
설이 아줌마는 부드럽게 사람들을 달래듯이 말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냥 가져다 버립시다. 제가 할게요.” 하면서 종이봉투를 잡으려고 했다.
전봇대 옆에 삐딱하게 서 있던 조나단 아줌마가 말했다.
“다들 바쁜 사람들이니까 얼른 열어봐요. 바빠 죽겠는데.”
저도 억울함을 풀어야겠으니 얼른 열어서 범인을 찾아요.”
정이 이모가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하여튼 빨리빨리 열어 봅시다.”
미실 아줌마가 손뼉을 두 번 치며 사람들을 집중시켰다.
“미안해요, 미안! 우리 모두 깨끗한 동네를 만들자는 거잖아요. 다 모였죠?”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쓰레기봉투를 열면 누구네 건지 금방 알겠네. 오늘 누군지 망신 좀 당해보라고 하자. 고소하다.’
먼저 설이 아줌마가 쓰레기봉투를 꼭 잡았다. 정이 이모가 잡아당겼다.
조나단 아줌마도 잡아당겼다. 셋은 비장한 표정으로 봉투를 자기 쪽으로 잡아끌었다.
그러자 봉투의 입구가 열리면서 쓰레기가 쏟아져 나왔다.
조나단 아줌마의 물병, 미실 아줌마의 쓰레기, 정이 이모의 구겨진 종이컵. 그리고 끈으로 꽁꽁 싸맨 검정색 비닐뭉치가 나왔다.
정이 이모는 그 뭉치를 손가락으로 찢었다. 놀랍게도 검정 덩어리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50,000원짜리 돈다발이었다.
정이 이모가 외쳤다.
“맙소사! 돈 뭉치였어?”
미실 아줌마가 바로 정이 이모 손에 든 돈다발을 빼앗으며 말했다.
“이제 생각 났다. 이거 내가 버린 봉투네요.”
“이거 왜 이래요. 함부로 만지지 마. 저리 가요!”
정이 이모가 돈다발을 재빠르게 낚아챘다.
조나단 아줌마도 정이 이모를 쫓아가서 돈다발을 낚아챘다. 끈이 풀린 돈다발이 공중에 흐트러졌다.
조나단 아줌마가 쓰레기 속에 있는 물병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맞아요. 이건 제 겁니다. 미안해요. 아침에 제가 쓰레기를 잘못 버린 거예요. 보세요! 제가 아침에 마시던 빨간색 루즈가 묻은 물병이잖아요. 보세요! 보세요!”
조나단 아줌마는 지폐들을 움켜쥐었다.
설이 아줌마가 크게 외쳤다.
“잠깐!”
모든 사람이 그대로 멈추고 설이 아줌마를 바라보았다.
“이리 주세요. 내 실수예요. 내가 시어머니 쓰레기를 갖다 버린 거예요. 내 쓰레기에요.”
아무도 설이 아줌마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안나 엄마가 공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이거, 신고해야 할 것 같아요. 이런 돈 함부로 건드렸다가 범죄에 연루되는 것 아니에요?
어떻게 해요? 사건이 더 커지기 전에 신고해야 해요.”
정이 이모가 말했다.
“신고라뇨?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미실 아줌마도 거들었다.
“맞아요, 솔직히 우리가 입을 다물면 누가 알겠어요. 똑같이 나눕시다.”
조나단 아줌마도 거들었다.
“신고를 왜 해요? 그냥 공평하게 나눠요. 간단하게!”
쓰레기를 주워서 찢어진 봉투에 담던 엄마는 낮은 목소리로 다시 외쳤다.
“이거 혹시 보이스피싱에 연루된 돈 아닐까요? 그 사람들이 검찰의 눈을 피하다가 여기다 버린 거일 수도 있어요.”
사람들이 모두 멈칫했다.
조나단 아줌마가 손뼉을 치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생각났다. 혹시 치매 노인!”
“치매 노인?”
미실 아줌마가 말했다.
“맞아요. 얼마 전에도 신문에 났잖아요. 노인이 버린 냉장고에서 1억이 발견되었다고. 나중에 보니 치매 노인이 버린 거라잖아요.”
엄마는 안나에게 쓰레기를 담을 종량제 봉투를 하나 가지고 오라고 했다. 안나는 쓰레기봉투를 가지고 왔다.
그러는 중에도 이모들은 돈뭉치를 가지고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엄마가 쓰레기를 종량제 봉투에 담으면서 주변을 정리하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이게 뭐죠? 이거 편지 같은데요.”
“웬 편지? 누구 편지일까?”
미실 아줌마는 엄마에게서 편지를 받아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 5_며느리와 시어머니
알고 보니 그 봉투는 설이 아줌마 시어머니 것이었다. 폐지 판 돈을 꽁꽁 싸서 묶어 둔 것이었다.
10년 정도 모았다고 한다.
천원 이천 원 모은 것을 은행에 가서 5만 원권 지폐로 바꿔 보관하다가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쓰레기처럼 위장한 것이라고 했다.
그날 마침 설이 아줌마가 쓰레기봉투인 줄 알고 내다 버리다가 그 사단이 난 것이었다.
미실 아줌마가 말했다.
“내가 그렇게 자주 봤는데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설이 아줌마가 골목 안 사람들에게 사과했다.
“제 실수로 이런 소란을 겪네요. 제가 그 봉투를 버리려고 가지고 나오다가 가게 열쇠를 안 가지고 온 거에요.
무겁길래 잠깐 둔 것을 또 깜박하고 그냥 갔어요. 바로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난 요즘 너무 정신이 없어요.”
“할머니 대단하시네. 이 집 며느리는 좋겠어. 이렇게 사랑받고 있으니, 나도 우리 어머니한테 잘해야겠다.”
미실 아줌마는 설이 아줌마의 등을 토닥거렸고, 정이 이모도 설이 아줌마를 안아주었다.
안나와 엄마도 설이 아줌마를 안아주었다. 조나단 아줌마는 정이 이모에게 화해의 악수를 청했다.
설이 아줌마는 정이 이모가 정리해 돌려준 돈뭉치를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여전히 폐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설이 아줌마가 돈봉투를 시어머니에게 건넸다.
그리곤 말없이 시어머니를 도와서 종이상자를 정리했다.
“어머니 죄송해요. 어머니 마음을 몰라드려서. 어머니 우리 이렇게 오래오래 살아요.
제 곁에 있어 주세요. 어머니! 오늘은 어머니가 좋아하는 뻥튀기 사 드릴게요.
전에는 어머니가 시장에 다녀오실 때마다 뻥튀기 잘 사 오셨는데. 이제 뻥튀기 가게는 없어졌지만 제가 슈퍼에 가서 사 올게요.”
할머니는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벗어서 설이 아줌마에게 매어 주었다.
설이 아줌마는 가만히 있었다. 둘이 손을 잡았다.
안나와 엄마도 이 모습을 지켜 보았다.
때마침 안나네 골목 하늘에는 뻥튀기를 닮은 둥근달이 떠올랐다.
달빛은 조용히 골목 안에 내려앉았다.
강원종합뉴스 춘천지사 염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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