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 마당= 염노섭 기자] 소설가 최삼경은 2023년 그의 첫 장편소설 『붓, 한 자루의 생』을 펴내 화제가 됐다.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작가회 강원지회 회원으로 소설을 썼으며, 신문 잡지 등 여러 매체에 인문, 사회, 역사 문화 관련 컬럼과 에세이 등을 쓴다.
저서로는 『헤이 강원도』, 『그림에 붙잡힌 사람들 1, 2』가 있다.
강원종합뉴스는 지난 12월 중순경 춘천 모 카페에서 그를 만나 '예술인 마당'에 월간 한 편의 글을 청탁하였다.
신은 있는가?
'신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은 새삼스러울뿐더러 즐겁지도 않다.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주말, 또 한 번의 큰 사고가 발생했다. 지역 공항은 시골의 대합실과 비슷해서 일가친척, 가족 단위, 친지 등의 행사성 여행이 많은 곳이기에 그 참사의 비극성이 더욱 도드라진다.
어떻게 이런 일이......., 몇 시간이고 뉴스를 보며 할 말을 잊는다.
인간의 이성으로 감당이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종종 신을 찾는다. 멀지 않은 기억들을 더듬어 보자면 세월호, 이태원 참사 때가 떠 오른다.
이밖에도 어떤 기사 거리가 되지 않았던 일들이, 지극히 개인적 체험에서의 일들이 신을 찾게 만든다. 인간들이 신을 만들었고, 그 신은 또 자신을 추종하는 인간들을 만들었다는 세간의 이야기는 논외로 치자.
다만, 지극히 험난한 역경이나 곡진한 슬픔 앞에서 신을 찾는 풍경을 익숙하게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빌던 어머니의 마음처럼 신은 인간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위로해 준다. 어쩌면 이 점에서 신은 인간들의 오만과 불손을 스스로 자정하는 기회를 제공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인간들이 벌이는 전쟁은 왜 종종 신들의 대리전이 되는지 모르겠다. 그토록 사랑과 박애를 깃발처럼 휘두르는 신들이 내내 인간의 역사와 함께하며 인간들을 죽이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지금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각자의 신을 내세워 ‘사랑’을 외치며 서로를 죽이고 있지 않은가.
신은 있는가? 굳이 멀리 있는 국경 밖에서의 이야기를 않더라도 지금 우리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은 자들이 내뱉는 저주와 증오의 말을 본다.
인간의 이성과 상식을 끌어 내려 중세의 공포를 주입하는 자칭 신의 대리인들을 본다.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위정자를 위하자고 신도들을 부추기고 기도하는 대형 교회 얼빠진 이들을 본다.
신도들의 배타적 단합을 유도하며 끝없는 헌금과 보시와 희생을 강요하는 방방곡곡 신(神)팔이, 믿음팔이 프랜차이즈를 본다. 온 동네가 돈과 신을 배합하여 제정신이 아닌 곳으로 달려가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리는 생각이라는 것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혼란의 중심에서 온몸에 ‘불신지옥, 예수천국’ 현수막을 두르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에게는 악의 평범성으로 유명한 한나 아렌트가 대학생 때 당대의 대학자인 하이데거에게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하고 물었다고 한다. 이때 그는 “생각한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대답을 하면서 하이데거는 심각한 얼굴을 했을까? 어쩌면 빙긋이 웃었을지 모른다. 어쨌든 이처럼 생각은 어려운 것이다. 외로운 일이고 그리하여 두려운 일이다.
이미 신의 종주국이라 할 서구에서도 신은 외면받고 셔터를 내리고 있다는데 동방의 작은 나라가 이제 와서 이토록 번성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다.
우리가 그토록이나 머리를 숙이고 신을 찾았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전모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애시당초 신을 찾을 일이 아니라 명백한 조사와 증거가 필요한 일이었다.
각양각색의 이해와 타산이 실타래처럼 꼬인 지금은 우리에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불빛은 없는 것이다. 생각의 힘으로 라이트를 비추며 앞을 보고 옆을 보고 때로는 뒤도 돌아보며 외롭고 두렵더라도 전진해야 하는 것이다.
무안공항 사고 희생자분들과 유가족들께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강원종합뉴스 춘천지사 염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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